충청남도/내포 천주교 문화

內浦 천주교 유적 답사(Ⅱ)

Geotopia 2016. 2. 21. 17:37

▶ Ⅰ편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Ⅰ편 보기 http://blog.daum.net/lovegeo/6780706


▶ 신리: 당진군 합덕읍 신리


  합덕읍 신리는 예당평야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산록이나 구릉 말단부에 입지하는 전통 촌락과는 확연하게 다른 입지를 보이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만들어진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대개 하천 주변은 홍수의 위험 등으로 촌락이 입지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므로 유서 깊은 마을들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마을은 삽교천과 직선거리로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마을이 입지한 곳은 전형적인 범람원의 배후습지이다. 신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다블뤼주교의 편지를 통해 당시 이 일대의 지리적 조건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전부터 교우촌의 온상이었고 요즈음에도 약 4천여명의 교우들이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교인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추억이 충만한 이 지방은 광대한 늪지이며 바다 쪽으로 펼쳐져 있는 저지대 늪과 해협이 많이 있고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자연분지로 인하여 사방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매우 습하지만 샘물은 자주 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의 항상 더럽고 자주 악취가 나는 늪의 물을 마십니다. 그래도 이 물은 해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물맛에 익숙해지면 됩니다. 땅은 모두 하천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하천들 사이로 좀 덜 낮은 부분에 지어진 집들은 자주 물에 잠깁니다. 집들과 마을들은 때대로 작은 섬이나 보통 섬처럼 됩니다. 이곳이 바로 제가 사목 순방 6개월의 대부분을 보낸 곳입니다.

                                                                                                                           -다블뤼주교의 편지-


<삽교천 유역의 범람원에 위치한 신리. 성지 조성과정에서 만들어진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면 주변이 다 보인다>


<성지에는 자연습지가 남아있다>


<신리성지>


  이처럼 마을이 입지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대신에 수로 교통은 편리했던 곳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을 동남쪽을 흐르는 삽교천은 밀물 때 배가 들어오는 것이 가능한 위치였다. 삽교천에 있던 포구 가운데 가장 상류에 있었던 구만포는 신리 보다 거의 4km 정도 상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치 특성 때문에 19세기 중·후반에 이 마을에 있던 민가가 조선교구청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블뤼주교가 기거했던 손자선(토마스)의 집. 조선교구청으로 쓰였다>


<손자선의 집과 다블뤼주교 동상>


<손자선 조상>


▶ 합덕성당


  내포 최초의 천주교회는 1890년 세워진 양촌성당으로 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있었다. 1889년에 입국하여 내포 선교를 맡았던 퀴를리에(Jean Jules Leon Curlier, 1863∼1935)신부가 내포에 들어온 이듬해에 세운 성당이다. 양촌본당은 신리공소에서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상궁리와 신리는 지금은 예산군과 당진군에 각각 속해 있지만 서로 인접한 마을이다) 삽교천 범람원 한 가운데 위치하여 포교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1899년 합덕으로 옮기게 된다. 이전 당시에는 한옥 건물이었으나 1929년 페랭(Philippe Perrin, 1885-1950)신부에 의해 지금의 두 개의 종탑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합덕성당(1960년 신합덕성당이 분리되면서 이곳을 '구합덕성당'으로 부르기도 한다)의 위치는 북동쪽으로 예당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범람원에 비해 거주에 유리한 입지로 인근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합법화(1886년 프랑스와 수교 이후) 시기 포교의 장소로 양촌에 비해 유리한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합덕성당은 이존창생가와는 5~6km, 솔뫼성지와는 불과 2.5km 남짓 떨어져 있다. 초기 천주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들과 인접한 곳이며 합법화된 이후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장소이다.


<합덕성당에서 북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예당평야 전경.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아늑한 느낌이 적다>


<성당내부>


<신앙의 토착화>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은 내포 최초의 천주교회였던 양촌성당에서 1895년에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내포 최초의 교회는 1890년에 설립된 양촌성당과 간양골성당(예산읍 간양리)이었다. 따라서 공세리성당은 내포에 세워진 세번째 성당이며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로는 내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공세리성당 전경>


  이 무렵 공세리 인근에 있던 여러 공소들은 모두 간양골 본당에 속하였으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간양골 본당이 폐쇄됨에 따라 양촌성당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초대 신부로 드비즈(Emilius Devise)신부가 공세리에 부임하면서 본당 설립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세창고터가 성당과 사제관 건물로 쓰였으며 관할 구역은 충청남도 아산·천안·공주 일대와 충청북도 진천 일대로 매우 넓었다. 이듬해 공주성당이 설립되고, 1901년 안성성당이 설립되어 지역이 분리됨으로써 아산 지역만 관할하게 되었다. 1897년 제3대 본당신부로 재부임(부임 1년 후인 1896년 주교단 당가신부로 임명되어 전임함으로써 2대 기낭(Guinand)신부가 부임하였고, 기낭신부도 1년 만에 전임함에 따라 1897년 재부임 함)한 드비즈신부에 의해 본당 건물과 사제관이 설립되었다. 이후 공세리성당의 상징이 된 고딕식 2층 건물이 1922년에 새로 지어졌다


  貢稅里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인 아산·서산·한산·청주·옥천·회인 등 40개 마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를 보관하던 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공세창은 안성천과 삽교천이 합류하는 내륙수로의 요충지이면서 입암산(206.1m) 줄기가 아산만으로 돌출한 곳에 위치하여 조창의 입지로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478(성종9) 貢稅串倉이 설치되었고 1523(중종18)80칸의 창고를 짓고 貢津倉으로 개칭하였다. 조선후기 폐창되기까지 충주의 가흥창과 함께 충청도에서 대표적인 세곡의 집합지였다. 공진창의 관할 범위는 아산, 천안, 목천, 전의, 직산, 평택, 온양 등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서산, 홍주, 신창, 결성, 보령, 대흥, 해미, 태안, 면천, 덕산, 예산, 당진 등 내포지역, 그리고 남포, 한산, 청양, 서천, 비인 등 내포 외곽지역, 이산, 석성, 은진, 연기, 홍산, 부여, 연산, 임천, 정산, 공주, 회덕, 진잠 등 차령산지 동부지역, 청주, 문의, 옥천, 회인 등 충청북도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 조운이 활발했던 전성기에는 600여호 3천여명이 거주하였고, 조운선 60여척이 정박하였다. 1631(인조9) 貢稅倉城이 수축되었는데 지금도 공세리성당 주변에 석축이 일부 남아있다.


<공세창의 성벽>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貢津倉. 城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 합덕제(合德堤, 合德池)


  삽교천 유역 범람원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수리시설이었다. 합덕성당의 뒷편에 위치한 합덕제는 범람원과 구릉대가 만나는 부분에 위치한 저수지로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설이었다. 많은 고지도에 합덕지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후백제의 견훤이 제방을 축조하고 땅을 개간하여 屯田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적 수리시설이 발달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메워져 논으로 활용되어 왔다. 최근에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합덕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합덕지가 수리시설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지형도>



<복원작업이 진행중인 합덕지>



<프란치스코교황의 솔뫼 방문 때 행사장에 공급되었다는 꺼먹지정식. 꺼먹지는 시레기를 절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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