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내포 천주교 문화

內浦 초기 천주교 유적 답사(Ⅰ)

Geotopia 2016. 2. 21. 06:45

▶ 답사일: 2016.2.20(토)

▶ 경로: 영인산 자연휴양림 출발 - 공세리성당 - 솔뫼성지 - 점심 - 합덕수리박물관 - 합덕성당 - 신리성지 - 예당평야

 

<답사 경로&nbsp; *원도: Google지도 & Google&nbsp;earth>

 

내포 천주교 관련 주요 사건

 

▶ 내포의 부활과 천주교

 

  오랫동안 잊혔던 이름인 내포(內浦)가 부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천주교이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초기 전파 역사를 살펴보면 내포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 전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이존창을 꼽을 수 있다. 그를 일컬어 천주교계에서는 '내포의 사도'라 한다. 이존창은 내포(예산 신암)에서 태어나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내포 일대의 포교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내포의 사도'라는 칭호는 내포가 그의 탄생지이면서 주요 활동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즉, 조선의 패망과 함께 잊힐 수 밖에 없었던 이름이었던 '내포'가 천주교사에 남아서 오늘날 새롭게 내포를 만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천주교사에 '내포'가 남아있게 된 것은 1845년부터 1866년까지 우리나라에 거주하면서 포교활동을 했던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1818~1866, 제5대 조선교구청 교구장)주교의 '備忘記'와 이를 바탕으로 저술된 달레(Claude-Charles Dallet, 1829-1878)의 '한국천주교회사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1874, 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블뤼주교는 1700년대 후반(대략 이승훈이 최초로 영세를  받고 귀국한 1784년 이후)부터 자신이 처형을 당하는 1866년 이전까지 초기 조선천주교사를 소상하게 정리하였다. 그는 최양업신부 순교 후 그 뒤를 이어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1861년 이후) 많은 시간을 내포에서 보내면서 저술과 전교 활동을 하였다.

 

  내포가 초기 천주교의 요람이 된 것은 내포의 지리적 조건과 관련이 깊다. 물론 이존창이라는 인물과도 관련이 있지만 단순히 이존창 개인의 지역적 연고 만으로 초기 천주교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세기에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들어오자 마자 탄압에 직면한다. 탄압기에 천주교도들은 한성부나 경기도를 피해 몸을 숨겨야 했는데 아주 가까운 곳은 위험했고 너무 먼 곳은 정세를 파악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가까워도 안 되고 멀어서도 안 되는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내포였다. 물리적 거리는 도성에서 제법 떨어져 있지만 뱃길을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비교적 쉽게 도성에 접근할 수 있는 2중적 위치였던 것이다. 일례로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 일가는 서울에서 살다가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지금의 청양군 화성면)에 정착하였다. 다블뤼주교가 주로 활동했던 곳이 내포였으며 아산만 주변과 인근의 천안, 안성 일대에 천주교 교우촌들이 많이 있었던 것 등을 통해서도 내포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인지지역(토착지역, varnacular region)의 사례 내포가&nbsp;나의 졸저에서 인용되어 교과서에 소개되었다. 전종한외, 고등학교 한국지리, 교학사>

 

▶ 여사울 이존창 생가지: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이존창(1752~1801)의 탄생지인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는 삽교천과 무한천의 합류지점에 인접한 마을로 조선시대 삽교천에 있던 대표적인 포구(즉, 內浦) 가운데 하나이다. 이존창이 경기도 양근(지금의 남양주)에 가서 천주교에 입교를 하게 된 것도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관련이 깊다. 삽교천과 무한천의 합류 지점에 있던 하평포구는 매우 번성한 포구여서 '如서울'이라 했고 이것이 변해서 '여사울'이 되었다는 說이 전한다. 이존창은 최초의 영세자였던 이승훈으로부터 1784년 영세를 받고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여사울은 내포 최초의 천주교 관련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이존창생가터. 2015.10.17>

 

 

  이존창으로부터 맺어진 김대건과 최양업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1~1846)과 두번째 신부 최양업(1821∼1861)은 모두 내포 출신이며 인척관계이다. 지연뿐만 아니라 깊은 혈연 관계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척 관계는 이존창을 중심으로 맺어졌다. 즉, 이존창은 두 사람의 진외가(또는 외가) 쪽 조상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이 없이 무려 세 가지 가능성이 전해진다.

  1. 김대건의 할머니(이멜라니아, 김택현의 처)는 이존창의 조카딸(형의 딸/일설에는 동생의 딸)이며, 최양업은 이존창의 생질녀(누이의 딸)의 손자. 이 경우 두 사람 모두 이존창의 3세손으로 이존창 대에서 갈라졌으므로 진외8촌간이 됨.

  2. 최양업의 어머니(이성례(마리아), 최경환의 처)가 이존창의 여동생의 딸. 이 경우는 최경환이 김대건에 비해 1대가 높아서 7촌 당숙이 됨.

  3. 최양업의 어머니가 김대건의 할머니(이멜라니아)의 조카딸, 즉 이존창 형(또는 동생)의 아들(이멜라니아의 오라버니)의 딸. 이존창이 3대조인 것은 1번과 같지만 이존창의  조카대에서 갈라졌으므로 두 사람은 진외6촌간이 됨.

  모든 설이 김대건 가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최양업 가계쪽으로는 이견이 있다. 그런데 김대건과 최양업은 1921년생으로 동갑이며 둘 다 장남이다. 따라서 이존창 형제 자매 간의 나이차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손들이 1대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2번 설은 최양업이 김대건에 비해 1대 위가 되어 가능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최양업의 어머니가 이존창의 여동생의 딸이라는 설은 옳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6촌간이라고 하는데 이 설에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최양업과 김대건은 이존창의 형(또는 동생, 이멜라니아(김택현의 처)의 부친)의 후손이라는 설, 즉 3번 설이 가장 타당하다. 



*최양업신부 서한, 1851.10.15 / 다블뤼 비망기 / 김정숙, 2009, 수리산 순교자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생활, 교회사학 제6호 /  마맥락·김용태, 1996, 성김대건신부 가문 순교자들 증거자들 / 차기진, 2007,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사회와 천주교 / 김해김씨 안경공파 족보.

     

  김대건은 여사울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최양업은 홍주 다락골(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태생으로 모두 내포 사람이다. 이처럼 초기 천주교 신자 중 상당 수가 이존창이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으며 이를 통해 천주교 역사에서 이존창의 역할과 내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 솔뫼성지: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이다. 김한현이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를 전도받은 시기가 18세기 후반이었으며 김진후(1814), 김한현(1816), 김제준(1839)이 19세기 전반에 순교하였다.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태어난 해는 1821년이었으며 그는 1846년 순교하였다.

  솔뫼는 예당평야의 서쪽 끝 구릉 말단부에 자리잡고 있다. '非山非野'로 일컬어지는 낮은 구릉 지대와 삽교천 범람원이 만나는 자리이다. 삽교천과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4km 정도인데 삽교천 범람원의 최외곽지대로서 일찍부터 개간으로 농경지가 만들어졌고 마을이 발달하였다.

 

<우강면 일대의 간척과 정착과정 *노충덕, 1991>

 

  위 지도에서 솔뫼는 '상포' 일대인데, 지도에 따르면 이 일대는 16세기 이전부터 간척이 이루어져 17, 18세기에 대부분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대건 가문이 솔뫼에 정착한 것은 증조부인 김진후(1735-1814) 때부터로 알려져 있다. 선대에 강릉에서 이주하여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에 정착했다가 다시 솔뫼로 이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가문이 솔뫼에 정착한 시기는 대략 18세기 후반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변의 대부분 지역이 거주지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삽교천 방향으로 간척이 일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계촌리와 솔뫼는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또한 계촌리는 이존창(1752~1801)이 살았던 신종리와 가까운 마을이었다. 김진후와 이존창은 나이 차가 꽤 났지만(김진후가 17세 연상) 같은 시대를 살았다. 이런 조건들이 김진후의 작은 아들 택현(1766-1830)이 이존창의 조카딸과 혼인을 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김대건 가문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계촌리(김진후 선대 입향), 신종리(이존창 탄생),&nbsp;솔뫼(김진후 이주)&nbsp; *1914년 지형도>

 

<솔뫼 풍 경. 비교도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彫像들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오히려 성스러운&nbsp;풍경과 잘 안 어울리는 느낌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솔뫼 및 김대건신부 연혁. 정착 연대와 그 이전 선조들에 대한 내용은 사료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

 

  18세기에는 이미 내포의 거의 대부분 지역이 거주지화가 진행된 상태였으며 종족촌락의 구성도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따라서 매우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예를 들면 신암면 종경리의 경주김씨(추사 김정희家) 가문) 기존의 세력을 누르고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솔뫼 정착 당시 김대건 가문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족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제3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페레올(1808~1853, Jean Joseph Jean Baptiste Ferréol, 김대건에게 사제 서품을 함)주교는 '종의 신분과 같이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다(1846.11.3 편지)'고 김대건 가문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김진후가 솔뫼로 이주하기 전 살았던 신암면 계촌리에는 종족촌락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기념관에 기록된 김희현을 입향조로 하는 종족촌락은 당진, 예산 일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적어도 내가 찾아본 바로는 그렇다).

  김수태교수(충남대)의 연구(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 2015, 네이버블로그 덕전의 문화일기)에 의하면 김대건 가문은 양반이 아니었다고 한다. 보통 양반 가문을 판단하는 근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족보이며, 둘째는 유교적 의례의 이행과 다양한 특권, 그리고 세번째는 문중과 종족촌락을 형성했는지의 여부이다.

 

  현재 족보는 거의 모든 가문에 일반화되어 있으며 19세기 당시에도 전체 인구의 60~70%가 족보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19세기 당시 이미 신분제도에 혼란이 일어나 족보를 위조하는 일이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 김대건가문의 역사는 전적으로 족보에 의존하여 설명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전하는 5~6종류의 김해김씨 안경공파 족보는 족보마다 약간씩 다른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대역죄에 버금가는 천주교 순교자들이 족보에 기재된 것은 족보가 훨씬 후대(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김해김씨의 특징이다. '士馬榜目'에 의하면 17세기 전반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김해김씨 숫자는 78위였으나 17세기 후반 64위, 18세기 전반에 33위, 18세기 후반에는 18위로 올랐다가 19세기 후반에는 2위로 치솟고 있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김해김씨는 전체 인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둘째, 유교적 의례를 준수하고 다양한 특권을 누린 경우로 양반을 한정하면 양반은 10~15%로 급격히 감소한다. 앞에 기술한 것처럼 솔뫼 김씨 가문은 김진후가 '감영의 작은 벼슬'을 한 것 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원칙적으로 조선은 평민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주었지만 평민은 설혹 급제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거의 막혀있어서 하급 관리 이상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세째, 문중과 종족촌락을 형성한 가문은 조선 후기까지도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하였다. 예산군지와 당진군지에서 지역 출신 인물들을 조사해보면 족보의 기록에 등장하는 사대부(관직을 가진 양반)인 김희현이나 김의직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문중은 경제적 기반인 토지, 특히 논을 갖춰야만 유지될 수 있었으며 종족촌락은 문관석, 신도비, 묘갈 등을 갖춘 가묘를 비롯하여 사당이나 정려 등이 주요 구성요소이다. 솔뫼나 신암 계촌리 일대에서는 이러한 경관을 찾아볼 수가 없다.

 

 김대건신부가 양반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신부를 양반의 후손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계급의식, 특권의식들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양반이었고, 그 특권을 기꺼이 버렸으므로 더 위대하다'는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양반이었던 것 보다는 오히려 평민이나 그 이하의 신분일 때 평등과 박애라는 기독교 정신에 비춰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기와집으로 복원된 김대건신부 생가. 김수태교수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김해김씨 순교보>

 

<순교자 기념비>

 

<솔뫼성지 조성 약사>

 

<프란치스코교황 방문(2014.8.15)을 기념하여 만든 조형물>

 

  기념관에는 김대건신부의 턱뼈가 안치되어 있다. 물론 실물은 아니지만 유해의 일부를 안치하는 종교적 관례는 마치 불교에서 사리를 안치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래의 내용은 호인수(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신부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순교한 1846년 9월에 한강변 새남터 모래밭에서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었고, 1901년 5월에 다시 서울 용산 신학교로 이장돼, 전쟁 때 경남 밀양으로 피난했다가 1953년 휴전 후에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1960년 7월5일의 처사다. 서울교구의 담당자들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3등분해서 굵은 뼈들은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 신학부)로,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한 것이다. 신학교에 안치된 유해들은 더 작게 쪼개져서 사방으로 분배되었다. 서울교구로부터 조각을 받아 모셔간 본당이나 기관들이 141곳에 달하며 샤르트르 성바오로수녀원에서 분배한 유해는 자그마치 200개가 넘는데 그중 일부는 일본과 미국에까지 보내졌다. 담당자였던 장복희 수녀에 의하면 유해들이 순교자 현양과 기도를 위하여 서울교구의 지시대로 성광(성체 등 귀한 것을 담아 보관하는 전례용기) 비슷한 함에 넣어 봉인·분배되었다 한다. 장 수녀의 고백이다. ‘나는 더는 유해 보관 및 분배 작업을 맡고 싶지 않다. 이유는 성인의 뼈를 조금씩 자른다는 것이 너무 잔인하고 못할 짓으로 여겨지고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럿이 나눠 기도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이라도 남은 유해를 한곳에 모아 큰 유리관에 봉안하여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자료집 62쪽) 아,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기념관에서 한 가지 지리학도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김대건신부가 옥중에서 세계지리 책을 지었고 영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번역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옛날에 중국을 거쳐 마카오까지 갔었고, 난을 피해 필리핀까지 다녀왔으니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대단한 여행을 한 셈이다. 직접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당시로는 국내에서 가장 세계지리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걸 알아본 대신들이 세계지리 책 저술을 부탁했던 것이다. 천주교를 막무가내로 탄압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런 정보들을 활용할 생각을 했더라면 우리는 식민지 역사를 거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예나 제자 지배집단의 생리는 국가의 긴 장래보다는 눈앞의 정권 획득에 더 관심이 많다. 긴 안목을 가진 사람이 정치에 뛰어드는 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별로 없는 것 같다.

 

<솔뫼의 기념관에 안치된 김대건신부의 턱뼈(모조). 위의 설명에는 세계지리 저술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내포가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라는 사실은 도보 성지순례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 Ⅱ편으로 이어집니다. 

 

☞ Ⅱ편 보기 http://blog.daum.net/lovegeo/67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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