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는 나라의 상징이다. 고국을 떠나서 태극기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상징이란 그런 것이다. 상징이란 구성원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국기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국가 구성원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국가정체성을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며 결과이다.
나는(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어려서부터 국기를 소중하게 여길 것을 철저하게 교육 받았다. 그 때는 아마도 정통성이 약한 독재정권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로 '국기에 대한 예의'를 더욱 강조했던 것 같다. 인류 역사의 비극을 주도한 히틀러가 엄청난 애국주의(사실은 게르만 우월의식을 내세운 국수주의)를 부르짖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국기에 대한 예절은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전국적으로 국기를 게양하고 역시 매일 오후 정해진 시간에 국기를 내리는 의식을 전국적으로 동시에 진행하는 수준이었다. 비라도 내리면 얼른 국기를 내려서 잘 보관해야만 했다. 국기 하강식 때는 전국적으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그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길을 가다가 멈춰서서 국기에 대한 예의를 갖출 것을 교육 받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바로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로 시작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야만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하긴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여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이란 것도 외웠으니까). 또한 미술시간에는 '건곤감리'에 '태극'문양을 비율에 맞춰서 열심히 그렸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국기는 그런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주는 그 앞에서는 엄숙해야 하며 그 원리와 구조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비를 맞히거나 훼손해서는 안되는 엄청난 존재였다. 외국 사람들이 자신의 국기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몸에 국기 문양을 그려 넣는 것이 불경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 때의 태극기는 '자발적 공감대에 기반한 상징'이라기 보다는 '정권의 의도로 전 국민에게 강요된 상징'이었다.
그 태극기가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 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국민과 친숙해진 가장 대표적인 계기는 2002월드컵이었다. 자발적으로 태극기가 경기장에 등장하여 관중석을 덮기도 했고, 천진 난만한 고사리 손에서 자연스럽게 흔들렸으며, 열혈 청년 붉은 악마의 볼과 등짝에 아로새겨지기도 했다. 패션 모자에 등장했고 심지어는 축구의 '축'字도 모르는 예쁜 아가씨의 아슬아슬한 스커트가 되기도 했다. 정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의 색채를 제거했고 전체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전국 동시 국기 게양 및 하강식을 철폐하였다. 어떻게 보면 국기에 대한 예의를 포기, 또는 허술하게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정책들은 오히려 국기를 국민들에게 친숙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진정한 자발성에 기초한 상징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는 '국기의 선진화'로 보였다.
그런데 요즈음에 가끔 과거 권위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권위주의 시대에 잔뼈가 굵은 나만의 과민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런 느낌이 드는 장면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오늘 아침 투표를 하러 갔던 우리 동사무소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국가 기관이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국민의 애국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양하기 위해서? 국가 기관은 국민의 편의를 위해 봉사하는 '국민의 종'이며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에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진리이다. 감히 종이 주인의 애국심을 의심한단 말인가? '국기=애국'이라는 단순 등식이 참이라 하더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에서 이런 지나친 전시 행정은 국고 낭비가 분명하다. 애국을 위한 국고 낭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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